일탈 끄적끄적



    오늘 잠시 볼일을 보려 동성로에 나갔는데, 졸업철이라 그런지 샛노란 중학생들이 3월의 제주도의 유채꽃밭인 것 마냥 활짝 피어 거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든 건 대부분 장미였지만 말이다. 꽃다발을 들고 좋아하는 음식점으로 삼삼오오 가는 중학생들을 보며 문득 감상에 젖었다. 그렇다. 감상은 대낮에도 젖을 수 있는 그런 존재이니까. 감상에 젖어 중학교 시절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그것도 중학생들이 가장 혐오하는 시험기간에 대하여 말이다.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일탈이 허용되는 날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이었다. 물론 학교를 안 가거나 학원 수업이 없는 일요일에도 놀았지만 그건 '정규 휴무'였기에 일탈에 해당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는 날들이 사람들이 붐비는 일요일의 동성로 낮과는 다른, 평일 낮이라 한가로이 거닐 수 있어서 아무래도 '일탈'의 이미지가 좀 더 강하게 느껴진 것 같다. 그렇게 보통 10시 즈음 마지막 시험이 끝나면 '어차피 OMR 답안지는 기계가 매기기 때문에 답을 맞춰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며 시험지는 가방 구석에 처박아 넣고 바로 친구 서너 명과 함께 긴 곡선의 대륜중학교 길을 따라 내려가 교문을 나섰다.

    버스는 주로 2.28 공원 건너편에 세워주는 425번이나 724번 버스를 애용했다. 우리가 비교적 빨리 버스를 타면 버스를 전세 낸 것 마냥, 잘 나가는 행세를 하며 의기양양하게 버스 뒷자석에 앉았지만 중3 형들과 같이 타는 날이면 고개를 푹 숙이고 앞에 타서 가야 했다. 그래도 시험이 끝났다는 해방감과 일탈을 한다는 생각에 마냥 즐거웠다. 20여 분이 지나 2.28 공원 건너편에 도착하면, 지하도를 지나 우리의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그게 바로 한일극장인 것이다. (가끔 아카데미 극장으로 '외도'를 하기도 했었지만 언제나 1순위는 한일극장이었다.) 우리는 중학생이었기에 당당히 1층 매표소에서 4,000원을 내고 영화를 봤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상영시간에 항상 촉박하게 도착했기 때문에 상영관에 급하게 들어가느라 팝콘을 샀던 것 같지는 않다. 영화는 뭐든지 상관없었지만 로맨스를 이해하기에는 우리가 전부 어렸기에 주로 액션이나 코미디를 봤던 것 같다.

    영화가 끝나고 몹시 허기가 진 우리는 밥을 먹어야 했다. 그룹의 재정이 부유한 상태면 오렌지스토리에 가서 돈까스나 시켜 먹는 것이고, 좀 쪼들린다 싶으면 롯데리아에 가서 데리버거를 먹는 것이다. 지금 데리버거를 막상 먹어보면 맛없는데도 가끔 생각이 나는 건 중학생 때 먹었던 것이어서 그런가 보다. 가끔 질릴 때면 푸짐한 철판 닭갈비를 내오는 꼬꼬존도 심심치 않게 이용했다. 그 시절에도 치즈를 얹어 먹었으니 치즈에 대한 사랑은 아마 그때부터 꽃 피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밥을 다 먹으면 그제서야 두발 구속에 3cm까지밖에 머리를 기르지 못한 까까머리 중학생 서너 명의 공식적인 일탈은 막을 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추가 일정이 있었으니, 바로 한일극장 지하에 위치했던 신나라레코드에 들리는 것이었다. 신나라레코드는 내 소박하지만 나름 심오한 음악생활의 첫 출발을 알린 곳이었다. 내 생에 첫 시디를 샀으니 말이다. 에미넴 앨범을 사서 뜻도 잘 이해 못하면서 들었던 게 엊그제 같다. 어쨌든 신나라레코드에서의 앨범구입은 나에게 중요한 의식과도 같았다. 시디를 구입해야만 일탈이 완료되었음을 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틈나는 대로 돈이 모이면 박화요비를 샀고, 브라이언 맥나잇을 샀고, 어셔를 샀다. 앨범이 담긴 신나라레코드 봉투를 들고 버스에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오늘도 해냈구나" 라는 뿌듯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모셔온' 시디는 JVC 시디플레이어나 라디오에 넣고 들었다. 많이 들었다. 어셔의 Confessions 앨범은 슬램덩크 만화책을 보면서 주로 들었기에 북산과 해남대부속이 맞붙을 때면 "Burn"이 생각나고, 산왕고교와 붙을 땐 "Caught Up"이 연상되곤 했다. 박화요비는 주로 공부할 때, 브라이언 맥나잇은 자기 전에 틀곤 했다.

    2014년이 된 이제는 아쉽게도 더이상 한일극장도, 신나라레코드도 없다. 한일극장은 대기업에 넘어가 CGV로 재바꿈했고, 신나라레코드는 없어지고 교보문고에 핫트랙스가 생겼지만 힙합 알앤비 파트는 아예 없으니 음반 고르는 맛이 없음에 영 가지 않게된다. 그렇게 '일탈'의 주축을 담당했던 두 곳이 사라졌다니 아쉽기도 하고, 시원섭섭하기도 하다.

2014년 2월 13일, 동성로에 만발한 중학생의 화원에서 내 일탈은 그렇게 잠시 떠올랐다가 내려앉았다.




덧글

  • 알렉세이 2014/02/13 19:17 #

    세월이 풍경을 바꾸더군요
  • 올시즌 2014/02/14 09:11 #

    시원섭섭 하더군요
  • 2014/02/14 10:5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2/14 11:4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홍쎄 2014/02/14 11:08 #

    자꾸 환경이 변하는게 아쉽지요ㅜ 저도 최근에 초등학교 한번 갔다가 놀라고 왔어요
  • 올시즌 2014/02/14 11:48 #

    아쉽더라고요 ㅠㅠ흑흑
  • 투명장미 2014/02/15 11:59 #

    치즈에 대한 사랑이 꽃 피던 시절이 중학생때로 거슬러 올라가는군요.
  • 올시즌 2014/02/15 13:20 #

    그렇습니다!
  • 은가 2016/12/20 04:33 # 삭제

    안녕하세요? 한일극장 지하에 신나라 레코드가 있었다니 놀랍네요. 하긴 한일극장이 없어진다고 섭섭해 하던 게 엊그제 같지만, 실제로 저 사진을 보니 십 년은 족히 더 넘은 시절로 다가오니 이상한 시간 감각이죠. 신나라는 서울에만 있었는 줄 알았는데 귀이한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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