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끄적끄적

I. 서론

놀고먹고 마시다 보니 어느덧 첫 출근 전날이 되었다. 혹자는 왜 내가 고시에 붙은 것도 아닌데 합격수기를 쓰고 앉아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이는 내가 고시 입문 당시 수많은 고시 합격수기를 보며 용기와 희망을 견지하면서 나 또한 언젠가 되든 말든 나의 생활을 정리하는 수기를 꼭 쓰겠다고 계획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수기를 읽을 누군가에겐 위로가, 누군가에겐 생활을 버틸 수 있는 그러한 단문이 되기를 바라며 나의 4 년간의 생활을 키보드에 써 내려가고자 한다. 혹시 마음이 괴로운 그대가 이 글을 읽는다면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고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다.

II. 2013년 - 졸업과 부닥친 악재

2013년 가을에 졸업하고 돌아와 외무고시에 필요한 한국사와 중국어를 준비하던 중에 추석 즈음 담당 주치의가 그렇게 말렸던 농구를 또 하다가 왼쪽 무릎마저 날려버렸다. 그렇게 2013년 하반기는 수술과 재활과 함께 지나가버렸다. 병상에 누워서 중국어 단어를 외웠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어쩌면 4년 간의 어두컴컴한 통로는 이때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III. 2014년 - 고시촌으로 들어가며

2월의 흐린 겨울 날씨였던 고시촌에 절뚝거리며 입문했다. 상반기는 무릎 재활과 한국사를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것 같다. 아침엔 운동하고, 하루의 대부분을 공부로 보내는 고시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고시식당 밥은 쉽게 질려서 그나마 색다른 음식을 먹는 게 인생의 낙이었다. 이 때 인생의 마에스트로 원준쌤과 지금도 의지하며 지내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아쉬웠던 점은 12월이 되어서야 독서실에 등록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내 생각보다 더 치열하게 공부하고 있느 ㄴ모습에 자극을 받아서, 독서실을 조금 더 일찍 등록해 다닐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연말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는 삭막한 고시촌에서 크리스마스와 시년을 독서실에서 보내면서 2014년이 지나갔다.

IV. 2015년 - 고시 중반과 건강 악화

2월의 1차는 보기 좋게 낙방했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 생각했기에, 학원이고 독서실이고 열심히 다니면서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운동도 열심히 했고, 밥 먹는 시간과 쉬는 시간도 줄여가면서 공부했었다. 이때가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시기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런 생활로 스트레스가 없다고 생각했던 내 정신과는 달리 내 몸은 상당한 과부하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햇볕이 내리쬐는 8월, 난 난생처음 가본 내과에서 위궤양이라는 판정을 들어 2015년 하반기에는 내장 재활과 공부를 병행해야 했다.

또한 연애에 대해 조금 끄적여보자면 고시생도 사람이기에 로봇형 공부 스케줄을 지향하지만 그만큼 외로움과 고독은 더 크게 다가온다.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고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큰 힘이 되는 것 같고 좋을 수밖에 없다. 다만 성인이기에 자신의 행동에 오롯이 책임을 져야만 하는 상황이 생긴다. 우선순위의 대차대조표를 잘 생각해봐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V. 2016년 - 마지막 해

2016년 초에도 지긋지긋한 PSAT의 벽에 막혀 낙방하니 아들이 관악산 밑에서 부식되어 가는 게 안쓰러웠던 부모님의 반대가 본격적으로 심해지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관직에 회의적이었던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께서도 자꾸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을 제시하셔서 괴로웠지만 기회는 삼 세 판이라고 생각해 일 년 더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말 괴로웠던 건 부모님의 반대가 아니라 사회와 친구를 좋아하던 활발한 성격이었던 내가 고시촌에서 자꾸만 움츠러들고, 위축되고, 자존감이 옅어져가는 가운데 다른 진로를 생각했을 때 자꾸만 성공하는 나 자신의 환영이 망상처럼 떠오르는 내적 갈등 때문이었다. 나도 가처분소득을 벌고, 여행에 소득을 가처분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사진 찍으러 다니고, 선배 결혼식에 가서 그냥 속 편하게 축하해주고 싶었다. 이러한 이상과 독서실에서 처분만 바라는 신세인 현실과의 간극이 너무나도 컸기에 퇴근 전 독서실 옥상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건강은 점점 안 좋아졌다. 목, 허리, 어깨가 수시로 쑤셨던 건 물론, 간간이 생기는 위염과, 극도로 피곤해도 눈은 붙여지지 않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래도 미치도록 공부나 해보자는 생각에 10월부턴 운동도, 음식에 대한 미련도 끊고 공부에 "올인"했다. 하짖만 비탈길을 내려오는 눈덩이와 같이 건강은 계속 악화되어 가장 중요한 시기인 12월-1월 구간에 일주일을 장염으로, 그리고 그 뒤 2주를 독감과 싸우면서 신이 나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직감하고 이번에 안 되면 접어야겠다고 생각해 미련을 비웠다.

그렇게 난 시험을 여한 없이 쳤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걸 받아들였다. 봄 햇살이 쓰다듬는 2017년 3월에 그렇게 고시생활을 접기로 하였다.

VI. 2017년 - 취업을 하다

이탈리아로 식도락 여행을 가장한 마음을 비워내는 여행을 다녀왔건만, 3년간의 생활로 이미 "진성" 고시생이 되어버린 나에겐 고시생 때의 습관을 덜어내는 게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미련은 비웠다고 했지만 의미 없이 술을 많이 마시고, 이미 대리를 달고 있는 친구들을 보며 조급한 마음으로 자소서를 썼던 것 같다. 이런 반-고시생/반-취준생 마음가짐으로 지원했으니 날고 기는 인사담당자들의 레이더를 피할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5월에 중국어학원을 다니면서 생활리듬을 일정하게 유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 친구들, 선후배들이 알게 모르게 일자리 정보를 제비같이 물어다 주고 그래서 자존감을 조금씩 키워나가며 하반기 공채를 노리고 있었는데, 취업소식은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다.

면접을 망친 회사에서 통보가 날아올 즈음인 월요일 저녁 문자메시지가 울렸고, 불합격이라고 생각하며 미련 없이 문자를 본 나는 [합격]이라는 글자를 믿을 수 없어 열 번 정도 읽고난 다음, 자꾸만 지난 3년의 생활이 눈앞에 아른거려 고시촌 원룸에서 한참을 울부짖었다.

VII. 나가며

나도 안다. 선후배/친구의 결혼, 취업, 승진과 같이 지인들의 경조사를 들으면 기쁜 마음이 들어 축하는 해주지만 마음 한편에는 마냥 축하만 해줄 수 없는 사실에 우선 화가 나고, 마음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열등감과 자괴감의 덩어리가 속을 갉아먹는다. 그래도 어쩌다 보니 빛 한 줄기가 보이는 지점에 굴러온 것 같다.

거의 후원자 수준으로 술과 밥을 많이 사준 위스콘신 및 써니식스틴 동기 및 선후배들, 컨저브 동기 및 선후배들, 아산 인턴 동기들에게 고맙다고 하고 싶다. 사실 사주는 밥보다도 끊임없이 나를 과대평가해주고 격려해준 덕분에 아직 살아있다. 고시촌 친구들은 조금만 버텼으면 좋겠다.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겠니, 힘내. 그리고 가끔 서비스로 뭐 하나라도 챙겨주신 고시촌 단골 사장님들에게도 고맙다고 하고 싶다. 살은 쪘지만 자양분이 되었네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원한 후원자인 부모님과 동생에게 감사하다고 하고 싶다. 이제는 희생을 덜 하실 수 있게끔 살아보겠습니다.

비록 남들보다 한참 늦은 지금에서야 사회생활을 시작하지만 이런 보잘 것 없는 글이 나에게든, 그대에게든 공기 한 줌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 같이 힘내서 살아보자.




덧글

  • 2017/07/02 16:41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7/02 20:0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알렉세이 2017/07/02 18:24 #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 올시즌 2017/07/02 20:05 #

    언제 한 번 놀러오시지요 ㅎㅎ
  • 2017/07/02 21:37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7/02 22:3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7/07/03 17:4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7/04 11:2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7/07/06 09:54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7/06 10:5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7/07/11 11:3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7/11 15:0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네이버